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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와 사회

백범 김구 암살범 안두희, 정의봉으로 처단한 박기서 선생, 별이되다!

by 김지윤의 생활백과 2025. 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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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대한민국 현대사에 깊은 흔적을 남긴,

 

백범 김구 선생 암살 사건과,

 

그 암살범 안두희를 처단한 박기서 선생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최근 박기서 선생의 별세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 사건이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안두희가 누구인지,

 

박기서 선생은 누구인지,

 

그리고 그들이 얽힌 충격적인 사건의 전말을 함께 풀어보겠습니다.

 

 

(이미지출처: 미래한국 www.futurekorea.co.k 캡처)

 

1. 백범 김구 선생, 그는 누구였나요?


백범 김구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자 독립운동의 큰 별이었습니다.

 

1876년에 태어나 일제강점기 동안 독립을 위해 헌신한 그는,

 

해방 후에도 통일된 나라를 꿈꾸며 남북협상을 추진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런 행보는,

 

당시 남한 단독정부를 주장하던 이승만 정권과 갈등을 빚었죠.


1949년 6월 26일,

 

서울 경교장에서 김구 선생은 느닷없이 총소리와 함께 쓰러졌습니다.

 

범인은 바로 안두희,

 

당시 육군 포병 소위였던 젊은 군인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개인적 범죄가 아니라,

 

정치적 음모로 얽힌 복잡한 퍼즐로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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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안두희, 그는 누구였을까요?


안두희는 1917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그는,

 

신의주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메이지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지만,

 

중퇴하고 중국에서 사업을 하다 해방 후 월남했습니다.

 

이후 서북청년회라는 반공 우익 단체에 가입하며 군대에 입대했죠.

 

1948년 육군사관학교 8기생으로 소위로 임관한 그는,

 

이듬해 김구 선생을 암살하며 역사에 악명을 떨쳤습니다.


1949년 6월 26일 정오,

 

안두희는 경교장에 찾아가 김구 선생을 면담하겠다고 요청했습니다.

 

김구 선생이 서재에서 붓글씨를 쓰고 있던 그 순간,

 

안두희는 권총으로 4발을 쏘아 선생을 즉사시켰습니다.

 

사건 직후 그는 체포되었지만,

 

놀랍게도 종신형이 15년으로 감형되고,

 

한국전쟁 중 형집행정지로 풀려났습니다.

 

심지어 군에 복귀해 승진까지 했죠.

 

이는 그의 배후에 강력한 세력이 있었다는 의혹을 낳았습니다.


안두희는 이후 군납업자로 활동하며 부를 축적했지만,

 

늘 백범의 그림자에 쫓기며 살았습니다.

 

그는 1992년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김창룡 특무대장의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이후 말을 바꾸며 진실을 흐렸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많은 이들에게 ‘역사의 죄인’으로 낙인찍혔죠.

 

젊은 시절 안두희(좌), 노년 시절 안두희(우) (이미지출처: 미래한국 www.futurekorea.co.k 캡처)

 

3. 박기서 선생, 정의의 화신


박기서 선생은 1948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난 평범한 시민이었습니다.

 

학창 시절부터 백범 김구 선생을 존경했던 그는,

 

버스 기사로 일하며 생계를 꾸리던 중,

 

백범일지와 권중희의 책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특히,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가,

 

아무런 처벌 없이 잘살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를 느꼈죠.


1996년 10월 23일,

 

박기서 선생은 운명의 결심을 합니다.

 

그는 부천시장에서 4천 원짜리 나무 몽둥이를 사서

 

‘정의봉’이라는 글자를 새겼습니다.

 

그리고 인천 중구 신흥동 안두희의 아파트로 향했죠.

 

안두희의 동거인을 장난감 권총으로 위협해 따로 가둔 뒤,

 

안두희를 나일론 끈으로 묶고 정의봉으로 그를 처단했습니다.

 

이 과정은 불과 30분 만에 이루어졌습니다.


범행 후 박기서 선생은 자수하며,

 

“민족의 지도자를 암살한 자가 천수를 누리는 것을 볼 수 없었다”라고 밝혔습니다.

 

그의 행동은 큰 논란을 일으켰지만,

 

많은 이들은 그를 ‘21세기의 독립군’이라 부르며 지지했습니다.

 

재판에서 그는 징역 3년을 선고받았지만,

 

국민들의 탄원과 1998년 3·1절 특별사면으로 1년 5개월 만에 석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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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정의봉, 그 상징적 의미


박기서 선생이 사용한 정의봉은 단순한 몽둥이가 아니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유묵 “견리사의 견위수명(이로운 것을 보았을 때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당했을 때는 목숨을 바쳐라)”이 적힌 종이로 감싸진 이 물건은,

 

그의 신념을 상징했습니다.

 

2018년,

 

박기서 선생은 이 정의봉을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하며 역사적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이미지출처: 연합뉴스 캡처)

 

5. 박기서 선생의 별세, 그리고 남은 이야기


2025년 7월 10일,

 

박기서 선생은 지병으로,

 

부천의 한 병원에서 77세의 나이로 별세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많은 이들에게 다시금 백범 김구 암살 사건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그를,

 

"우리 시대의 의인, 21세기 독립군"이라 칭하며 애도를 표했습니다.


안두희의 암살 배후에는 이승만 정권, 군부,

 

심지어 미국 정보기관의 개입 의혹이 제기되었지만,

 

명확한 증거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박기서 선생은 안두희를 처단함으로써,

 

역사의 정의를 세우려 했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은 진실이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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